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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Fair Darling 3

The Noble and Clubs

1852년 겨울

 

 마이 페어 달링 사교 클럽이 수면 아래로 가라앉고 진보와 개혁이 사교계에서 수그러들기 시작한 어느 날, 요크 공작의 성에서 작은 회동이 있었다. 아일스버리 후작가의 차녀 레베카 드 마이어와 요크 공작이자 영국의 제 4왕자 린튼 히스클리프의 만남은 여러 번에 걸쳐 일어났고, 그 해 겨울이 가기 전에 그들은 하나의 결론에 도달했다.

 

 

1853년 5월

 

 언제나와 같은 사교계에 한 장의 초대장이 도착했다.

 

[지성과 미래를 최고의 가치로 두는 당신에게. 부디 새로운 파티에 왕래해주시기를 바라고 있겠습니다. - R.M ]

 

 초대장을 받은 사람들은 당시 진보적이라 외면받았던 개혁적이고 젊은 귀족들, 귀족이 아님에도 그 재능과 실력으로 부와 명성을 쌓은 젠트리들, 그리고 그 재능이 신분과 환경에 밀려 개화하지 못했을 뿐 충분히 자질이 있는 몇몇 하류층들이었다. 초대장을 받은 사람들은 이끌리듯이 그 파티에 참석했고,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 사교계에는 새로운 클럽이 등장했다.

 

 왕자 린튼 요크 공작의 후원을 받는 마이 페어 달링 클럽의 새로운 전신이자 의지를 이은 개혁과 지성을 후원하는 사교 클럽. 레베카 드 마이어가 클럽장으로 있게 된 빅토리아 퀸즈 클럽의 창설이었다.

 

 

1853년 7월

 

 왕족의 후원을 업고 무섭도록 성장하며 세력을 키우는 퀸즈 클럽에 기존의 보수파 클럽들은 불안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보수파들의 중심이 되었던 살롱 드 베리타스는 이미 이십 여년전부터 그 명목만을 간신히 유지하고 있을 뿐, 새로운 사람들을 끌어들이거나 위력을 과시할만한 재력을 갖추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불안감 속에서 살롱 드 베리타스의 클럽장, 링컨 백작에게 손을 내민 것은 다름아닌 제 3왕자 앨버트 알바니 공작과 13공작가의 한 명인 서머셋 공작가였다.

 

'전통과 미덕, 그리고 예절과 유지를 위해.'

 

 회동에서 그들은 하나의 결론을 내렸다. 지금 크고 있는 신진세력에 대응점이자 대척점이 필요하다고. 유력한 귀족가와 왕족의 후원 아래에 빠른 속도로 베리타스는 재정비를 갖추었고 다시 한 번 일어설 수 있었다.

 

 

1854년, 봄

 

 봄이 돌아왔지만 두 클럽 사이에는 언제나 냉랭한 기류가 감돌았다. 겉으로는 상냥하고 예의바르게 대하면서도 전혀 다른 가치관과 이상을 가진 그들은 파티장에서 부딪힐 때마다 알력다툼과 신경전이 벌어졌다. 정작 후원자인 두 왕자가 그리 친밀한 태도를 보이지 않으니 그러한 신경싸움은 예견된 것일지도 몰랐다.

 

 봄이 가고 여름이, 가을과 겨울이 지나고 다시 봄이 올 때까지 그러한 신경전은 계속되었다. 어느 면에서는 퀸즈 클럽이, 다른 면에서는 베리타스가 앞섰다. 서로가 자신이 '최고'임을, 혹은 '바른 길'임을 내세우며 시간은 지나갔고, 그 과정에서 두 클럽은 사교계를 대표하는 양대 축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1855년, 7월

 

 대영제국의 왕위 계승서열 5위, 알렉산더 루이 에드워드 케임브리지 공작의 16세 데뷰탕트가 성대하게 치러질 것이라는 이야기가 사교계에 퍼져나갔다. 왕실과 13공작가, 그리고 수많은 귀족들이 자리할 왕실 주최의 파티에서 가장 큰 관심사는 단 하나였다.

 

 어느 쪽이 과연 최고일 것인가.

 

 

[진보와 개혁, 그리고 예술과 지성을 숭상하는 당신에게.]

[전통과 미덕, 그리고 인문과 예절을 바라보는 그대에게.]

 

 

 당신을 파티에서 기다립니다.

 

 

@1855. Londonn, England. My Fair Darling Season 3 - Clu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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